내가 차를 좋아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욕이 왕성하던 그 시절에, 기숙사에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던 관계로 밤에 허기가 질 때면 녹차를 주전자 한 가득 끓여서 마시곤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음도락은 커피와 홍차를 아우르는 잡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하루 동안 시간대별로 마시는 차의 종류가 확립이 된 것 같다. 결국은 카페인의 함량의 역순으로 시간에 따라 배열된 셈인데, 아침에는 아침 식사와 함께 아메리카노를, 점심 후에는 홍차를, 저녁 후에는 녹차를 마시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사 마시지는 않고 직접 끓여 먹는 터라, 얇은 주머니 사정에 큰 타격까지는 받지 않고도 누리고 있는 호사이다.
문제는 미국에서는 괜찮은 녹차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커피와 홍차야 워낙에 서양에서 즐겨 마시는 것이라 한국에서보다 좋은 원두와 홍차잎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마시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녹차를 구하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하거나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적당히 "green tea"라는 이름만을 달고 있는 녀석을 동네 수퍼마켓이나 스타벅스같은 곳에서 입양하면 이것이 홍차인지 녹차인지 알기 어려운 맛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 한동안 일본 식료품점과 커피빈, 그리고 peet's를 들락날락하면서 생체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소정의 성과를 얻을 수 있게된 것 같다.
일단 일본에서 들여와 파는 녹차들 중 미국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genmai cha와 sencha이다. 이중 genmai cha(玄米茶, 현미차)라는 것은 결국 현미녹차를 말하는 것이고, sencha(煎茶, 전차)가 우리가 생각하는 녹차에 가깝다. 문제는 sencha의 경우는 매우 작은 녹차잎 조각 -- 혹은 가루 -- 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녹차나무 종자가 달라서 그런 것인지, 덖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맑은 맛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위 사진은 Peet's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genmai cha의 사진이다. 현미 알갱이와 비교해보면 녹차잎의 크기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위 사진은 역시 Peet's 홈페이지서 가져온 sencha의 사진이다. 잎조각의 크기나 차의 탁한 정도를 genmai cha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예전에는 한국 수퍼마켓에 가면 설록차에서 나오는, 피라미드 티백에 담긴 질 좋은 잎녹차를 구할 수 있었다. 이런 녹차가 좋은 이유는, 피라미드 티백은 종이 티백과 다르게 큰 구멍이 많이 있어서 차가 더욱 잘 우려져 나오고, 또한 녹차 잎이 부서져있지 않아서 맑고 은은한 향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녹차가 한국 수퍼마켓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서, 한국산 티백 녹차, 일본산 티백 녹차, 일본산 sencha등을 전전해보았지만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아서 비축해놓은 설록차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희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동안 티백이 아닌 주전자에 우려먹는 잎녹차로는 누나가 중국여행을 다녀와서 사다준 용정차(龍井茶)를 마시고 있었는데, 맑고 은은하면서도 다소 강한 풀잎향이 약간 느껴져서 썩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부로 가지고 있던 한 통을 다 마시게 되어서, 잎녹차를 어디서 구하나 고민하면서 여기 저기를 찾아보던 중, 미국에서도 용정차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Lung Ching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어서 그것이 용정차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Peet's 홈페이지에서 Lung Ching 이 dragonwell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사진이 용정차, 혹은 이곳 이름으로 Lung Ching (dragonwell)이라고 불리는 녹차이다. Sencha의 사진과 비교하면 잎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원하던 설록차를 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꽤 마음에 들던 녹차를 쉽게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 매우 기쁘다. 아직 Lung Ching green tea를 구입해보지는 않아서 과연 얼마나 용정차와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써 놓고 보니 'Kimchi가 김치랑 얼마나 비슷한 맛이 날지'라고 써 놓은 셈이 되었는데, 사실은 그게 정확히 내가 나타내고자 하던 바이다. 똑같은 음식이 국경을 건너가면 바뀌게 되는 것이 이름 뿐만이 아니니까!)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순전히 내 경험에 의한 것이라 얼마나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용정차의 잎의 크기가 제일 크고 잎이 덜 말려있으며, 일본 sencha는 가루가 많고 잎의 크기는 작은 편이고, 우리나라의 작설차는 잎이 돌돌 말려있고 (그래서 참새의 혀라고 불리운다는 것 같다) 잎의 크기는 그 중간정도라는 것이다. 한중일 삼국의 문화적 특징이 살짝 엿보이는 부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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